용궁김씨(龍宮金氏)는 대보공 (大輔公 휘알지)의 36세손(世孫)인 경숙공 (景肅公) 휘 존중 (存中) 을 관조 (貫祖)로 하는 신라 김씨의 일족이다.

 

존중(存中)은 경상북도 용궁 사람으로서 고려 제18대 의종 (毅宗)때 태자소부(太子小傅-三師의 하나) 이부상서(吏部尙書-현재의 장관)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종2품) 수문전(修文殿-학자가 왕에게 강론을 하던곳) 대학사(大學士-수문전의 으뜸 정2품)를 지낸 분으로서 의종으로부터 용궁군(龍宮君)으로 봉해지면서 용궁김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公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公의 8세손으로 누대(부.조부)에 걸친 전통적인 왕사(王師-왕의스승)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남성시를 거쳐 인종(仁宗)때 대과에 급제하여 태자시학(太子侍學)이 되었다"서기1146년 의종이 즉위하자 내시원(內侍院)들어가 한림원(翰林院)에겸직 좌정언(左正言) 지제고(知制誥)및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 知制誥)를 거쳐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및 군기를 맡아보던 관청인 추밀원(樞密院)의 좌우승선(左右承宣)에 올랐고 이어전조(이부와 예부을 통합한 관청)를 겸하여 문문백관(文武百官)의 선임권을 맡게 되었다.

 

이어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말미암아 서기1156년(의종10년)에 향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이에 왕은 크게 애도하며 公에게 경숙 (敬肅)이라는 시호를 내리시고 한충내보공신(翰忠內輔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를 제수하시면서公을 용궁군(龍宮君)에 봉하셨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公을 시조로하고 본관(本貫)을 용궁(龍宮)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경숙공 서거 후 15년에 일어난 무신란(일명 정중부의 난)으로 수 많은 문신들이 참화를 당할 때 공의 장남 광(光)도 참살을 당하였고 가족 또한 사방으로 이산되었으며 그로 인해 묘지또란 실전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다행히도 공의 묘지석(墓誌石)이 서기1929년 8월에 일본인 천지무태랑(天池茂太郞)에 의해 발견되어 규장각에 헌납되었고 그 후 경성제국대학에 이은 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제22호로 보존되고 있다. 다만 발견장소와 출토 경위등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약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은 우리후손으로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묘지석의 소장 사실을 안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79년 정월에 지리산 정기가 뻗어 내린 경남 산청군 차황면 장위리 가장등에 재천(在天)하신 공의 영을 모셔 단소(檀所)를 마련하고 자손들이 엄숙한 마음으로 공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